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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ournal of Otorhinolaryngology-Head and Neck Surgery > Volume 48(12); 2005 > Article
Korean Journal of Otorhinolaryngology-Head and Neck Surgery 2005;48(12): 1434-1441.
Prosper Meniere and Meniere's Disease.
Kyu Sung Kim
Department of Otorhinolaryngology-Head & Neck Surgery, College of Medicine, Inha University, Incheon, Korea.
메니에르와 메니에르병
김규성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이비인후-두경부외과학교실

서     론


  
재발성 어지럼, 청력저하, 이명, 이충만감을 특징으로 하는 내이 질환인 메니에르병이라는 명칭은 프랑스 의사인 Prosper Meniere(1799
~1862)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어떤 질병에 특정인의 이름이 부쳐있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사전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 질병을 발견하거나, 정의를 확립한 의학자를 기리게 되며, 이런 점에서는 Prosper Meniere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메니에르병의 빈도는 보다 엄격해진 최근 기준을 적용하였을 때, 전체 어지럼 환자의 약 10%정도인 그리 흔하지도 않은 내이 질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메니에르병을 그 역사와 함께 고찰해 볼 가치가 있는 이유는 첫 번째, 이것이 어지럼, 난청을 주증상으로 하는 내이의학 발전의 역사와 함께 하며, Prosper Meniere가 여기서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현재에도 메니에르병의 진단기준이 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메니에르병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발전 과정을 포함하여 내이질환에 대한 현재 우리의 지식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메니에르병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내이질환을 공부하는 의사에게 상식 이상의 가치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Prosper Meniere는 누구인가?

   Prosper Meniere[prVspQːr menjQːr](1799
~1861)(Figs. 1 and 2)는 1799년 6월 18일에 프랑스 서남부의 Angers에서 상인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의학공부를 위하여 파리로 유학, Hotel-Dieu 졸업 후 내과, 외과, 산과를 전공하고, 1828년에 학위를 취득하였다. 1832년부터 같은 대학 조교수로 산과학, 위생학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 무렵 프랑스 남부지방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Department of Aude and haute-taronne로 보내졌으며, 여기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의료행정에 수완을 발휘하여 프랑스 국왕이 수여하는 레종도뇌르 훈장(Chevalier de Legion d’Honneur)을 받았다. 1838년부터 파리 국립농아연구소장(physician-in-chief at the Institute of deaf-mutes)으로 부임하여 사망 시까지 여기서 일하였다. 당시에는 의료기관 내 이비인후과가 독립되어 있지 않아 난청환자가 이곳으로 많이 모였고, 따라서 난청에 동반된 어지럼 및 이명 환자도 많아서 그는 이러한 환자를 수백 례 이상 경험하게 되었다.1)
   일견 그가 오늘날 메니에르병의 효시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이러한 여건아래 놓이게 된 일종의 혜택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뛰어난 통찰력, 사고력 및 식견에 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대단한 활동가로서 외과, 내과, 산과, 부인과, 이비인후과, 기형학, 위생학, 농아교육, 농아와 근친결혼(일종의 유전학), 의사학에 걸쳐 광범위한 분야의 의학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의학 이외에도 식물학, 혁명역사, 여행기, 문학(시) 등에 관한 논문, 수필(사후 아들에 의하여 출간)에 걸쳐 다채로워 놀랍기까지 하다. 또한 의사인 동시에 식물학자 및 정치가로도 활동하였다. Frenzel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논문들은 학술적 가치를 넘어 문화적 가치가 있고, 그의 업적은 19세기 의학계의 수준의 지표가 될 만하며, 그의 논문에서 사상과 사색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2) 현재 메니에르병이라고 불리는 질환에 대한 다섯 편의 그의 논문은 1862년 2월 7일 사망하기 전 해인 1861년에 발표되었으므로 일생에 걸친 활발한 연구업적의 마지막은 내이질환 분야가 장식하게 된 것이다.
   병명으로 쓰이는 그의 이름은 한글로 '메니에르'라고 표시하지만, 외국의 여러 논문에서는 'Ménière', 'Menière',‘Meniére', 'Meniere'가 혼재되어 쓰이고 있다. 그의 이름이 붙은 메니에르병이라는 병명이 널리 쓰이게 된 계기를 만든 1867년 Politzer의 발표에서는 'Meniére'라고 표기하였지만 현재 이것은 명백한 오기라고 생각되고 있고 쓰이지 않는다. 나머지 세 가지 중 'Ménière'와 'Menière'는 19세기 당시 프랑스에서도 섞어서 사용되던 시기라서 어떤 것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본인 스스로는 후자를 사용하였으나(Kramer책의 프랑스번역판 표지, Fig. 4), 학회 등의 공식 인쇄물에서는 전자로 표기하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에서는 후자를 사용하고 있다. 모국인 프랑스에서는 표기법에 대한 논란이 없었던 반면, 오히려 독일에서 한때 어떤 것이 맞는지 학자들의 논쟁을 벌인 시절이 있었다고 하니 흥미롭다. 한동안 영국, 미국 등 영어권에서도 프랑스처럼 'Ménière'라고 표기했으나, 60년대 이후 영어가 기준이 되면서 M. Portmann이 영어논문에 쓴 것과 같은 'Meniere'라는 표기법이 널리 쓰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 가장 많이 쓰이는 영문 표기법이 되어있다.

Prosper Meniere의 연구업적

   Prosper Meniere의 논문은 1861년 1월부터 9월에 걸쳐 5회에 걸쳐 Gazette méicale de Paris에 발표되었다(Fig. 3).2) 이 중 첫 번째는 1월 15일과 22일에 Imperial academy of Medicine의 토론회 내용이 포함된 것이고, 그에 앞선 1월 8일 강연회에서 발표한 내용이 이후 출간된 다섯 편의 논문 중 마지막 편에 소개하고 있어 순서가 바뀐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다섯 편의 논문내용을 각각 소개하고자 한다.

Gaz. méd. de Paris, 16, p55~57(1861년 1월 26일 발표):congestiones cérébrales apoplectiformes
   이 논문은 당시의 의학계 대가인 Trousseau의 사회로 진행된 실조성뇌울혈(congestiones cérérales apoplectiformes주1))에 대한 토론회(1861년 1월 15일, 22일 2회)에서 개인적 의견을 서술한 것이다. 여기서 이전부터 어지럼과 난청의 진단명으로 흔히 사용하던 congestiones cérérales apoplectiformes(영문으로 cerebral congestion of apoplectic type라고 표기1))의 원인에 대하여 토론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다양한 주장이 이루어져, 간질(Trou-sseau), 혈관변화에 의한 뇌증상(Bouillard), 진행성 마비(Tardieu), 뇌연화증(Durand-Fardel) 등의 의견이 있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메니에르는 1월 8일의 강연내용과 마찬가지로 본인의 증례 및 자신의 소속인 국립농아연구소 선임자이자 당시의 저명한 이과학자인 Itard의 앞선 보고 등을 근거로 내이장애가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메니에르는 불과 1주전 강연회 발표에서 내이원인설을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Trousseau를 중심으로 구성된 토론회의 발표자로 원래 선정되지는 못하였다. 다행히 Trousseau에 의하여 발표 기회를 얻었으나, 가설이 파격적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아닌 지위 때문이었는지, 토론의 주제로 그의 가설은 상당히 묵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니에르는 이 첫 논문을 통하여 그나마 기회를 준 Trousseau 교수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고 있으나, 반면 실망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진실에 보다 가까운 위대한 발견이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나 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그나마 이런 기회조차 없었다면 다시 누군가에 의해 찾아지기까지 어쩌면 수십 년 이상 '실조성뇌울혈'의 원인를 찾아 헛된 노력을 하여야 했을 지도 모르겠다. 

Gaz. méd. de Paris, 16, p88~89(1861년 2월 9일 발표):Maladies de I'oreille interne offrant les symptomes de al congestion cérérale apoplectiforme
  
'실조성뇌울혈의 증상을 보이는 내이질환'이라는 제목이 말하듯 어지럼과 난청을 보이는 두 례의 증례보고가 있었다. 이 두 례는 모두 45, 47세 의사로 인텔리 계층이라는 점과 뇌질환이 아닐 가능성, 내이 원인일 가능성을 기술하였다. 

Gaz. méd. de Paris, 16, p239
~240(1861년 4월 13일 발표)
   네 증례를 보고하며 앞의 보고에 이어 내이질환이 원인일 가능성을 주장하였고, 이 중 한 례는 앞의 두 번째 보고에 있는 의사 중 한명으로, 의사로서 자신의 증상을 상세히 알려준데 대하여 감사하고 있다. 아울러 간질이라는 진단명으로 입원되어 있는 환자 중에서 난청자가 얼마나 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Gaz. méd. de Paris, 16, p379
~380(1861년 6월 15일 발표)
   앞의 보고에 대한 관찰을 포함하며, 그간의 증례를 보았을 때 원인은 모두 귀질환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의사는 이점에 주의하고 정확한 진단을 붙이고 틀린 치료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의 이 네 번째 논문은 마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훈계하는 듯 상당한 자신감을 보이는 기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역사를 살펴보면 Marie-Jean Pierre Flourens(1799
~1867)는 이전부터 실조성뇌울혈이라는 진단명을 붙여서 행해져 온 많은 위험하고 비인간적 치료들에 대하여 개탄하며, '귀질환이 너무 자주 뇌질환으로 오진되고 있다.'라고 표현을 1836년에 이미 하였으나 메니에르가 Flourens의 이 말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Gaz. méd. de Paris, 16, p597
~601(1861년 9월 21일)
   이 보고는 저자가 위에서 보고의 순서가 바뀐 느낌이 든다고 기술한 바와 같이, 이 다섯 번째 논문에서 1월 8일에 발표한 내용을 자세히 적고 있으며, 많은 책에서 소개하여 널리 알려진 '어지럼과 난청의 소녀'증례가 나온다.
   앞선 1861년 1월 8일 파리에서 열린 Imperial Academy of Medicine에서 메니에르는 'Sur une forme particulière de surdité grave dépendant d'une lésion de l'oreille interne(내이장애에 의한 고도난청을 보이는 특이한 증례에 대하여)'에 대하여 강연을 한 바 있다. 이 논문은 내이질환을 주장하는 그의 연이은 논문의 다섯 번째이자, 그의 일생 최후의 논문이다. 그가 처음 내이질환의 암시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명한‘어지럼과 난청의 소녀’증례를 포함하고 있는만큼 심혈이 기울여져 있고, 사망 수개월 전 출간된 만큼 더욱 소중한 논문이다.
   이 논문내용을 정리하면, 건강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어지럼 발작, 구토, 난청, 이명, 안면창백, 발한을 보였으며, 전신상태, 뇌, 소화기의 이상이 없고, 중이도 정상이며, 어지럼 발작 후 수 개월 내지 1년에 걸쳐 호전되었으나 난청, 이명은 남아있는 증례를 다수 관찰하였고, 원인이 청각기관의 장애(저자 주: 당시는 전정, 와우의 기능적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와우장애의 의미가 아니라 내이장애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소녀의 증례를 인용하고 있어 원문을 소개한다.

  
'나는 이전에 한 소녀의 증례를 기술한 적이 있다. 이 소녀는 한 겨울 밤 마차로 여행을 하던 중이었고, 생리 중이기도 했으나 굉장한 추위로 갑자기 농이 되어 Chomel의 병원에 입원하였다. 심한 어지럼이 있었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구토를 했다. 입원 5일 후 갑자기 사망하여 부검을 실시하였으나 대뇌, 소뇌, 및 척수에는 이상이 없었다. 이전에 청력이 정상이었으나 갑자기 농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두개골을 세밀히 관찰하였다. 여기서 발견한 유일한 병변은 반고리관에 붉은색의 반고형 물질, 즉 일종의 혈액삼출물과 같은 것이 충만해 있는 것이었다. 이 소견은 반고리관에만 있었고, 와우에는 없었다. 신중한 부검을 결과를 보다 상세히 정리하면, 병변은 붉은색의 반고형 물질이 오직 반고리관의 외림프강에만 충만해 있는 것이었다.’

   여기서 '붉은색의 반고형 물질'이란 현재로서는 내이 출혈로 추정하고 있다. 내이 출혈이 소녀에게 왜 갑자기 발생되었는지에 대하여 백혈병이었을 것이라는 추정과,3) 미로염에 의한 내이출혈과 뒤이은 뇌막염이라는 추정이 있다.2) 흥미로운 것은 한동안 이 논문을 인용하여 메니에르병의 원인을 내이출혈로 단정하는 의사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잘못된 이해를 근거로 메니에르의 주장이 틀렸다는 비판이 있었다는 것이다.3)4)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대 메니에르병의 개념은 '내이출혈 질환'이 아니다. 비록 메니에르 본인은 현재 메니에르병의 병태생리의 중심인 내림프수종에 대하여 알지 못했지만, 당시까지 축적된 지식 하에서 '어지럼, 난청=뇌질환'이라는 기존 수백 년간의 고정관념을 변화시켰다는 것이 메니에르의 업적인 것이다.
   다시 위 메니에르의 원문을 보면, '이전에 증례를 기술한 적이 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의미는 M'Kenzie(1924), Atkinson(1945)의 조사에서 추정하고 있다.3) 메니에르가 당시의 유명한 청각학자인 Kramer의 독일어 교과서를 1948년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 하였으며(Fig. 4), 이 책의 397쪽에 원문번역이 아닌 역자의 주석으로 이 소녀의 증례가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교과서에서는 이 다섯 번째 논문의 기술과 달리 어지럼에 대한 기술이 없이 난청에 대한 소견만 적고 있고, 붉은색 반고형물질이 와우를 포함한 내이 전체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가 부정확한 기억을 근거로 나중에 본인의 이론에 맞도록 수정했다는 Atkinson 등3)의 비판과, 이전에 어지럼에 대한 기술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실을 왜곡한 것은 아니며, 메니에르가 이 증례를 인용한 교과서의 단원이 청력에 관련된 것이라 어지럼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적지 않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다는 Williams 등4)의 인정여론이 나뉘어 있다.

Prosper Meniere 연구업적의 역사적 배경

   이처럼 그의 연구업적을 살펴보면, Prosper Meniere가 재발성 어지럼, 난청, 이명, 이충만감을 주증상으로 하는 메니에르병이라는 질환을 우연히 발견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위와 같이 어지럼 질환이 내이장애에 의하여 발생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내이학, 즉 해부, 생리, 병리의 발전과 함께 고찰해 보고자 한다.
  
어지럼, 난청, 이명을 보이는 질환에 대한 기술은 고대 그리스시대의 히포크라테스(BC460?~BC377?) 시절부터 있다. Julius Caesar(BC100~BC44)가 어지럼으로 고생하였을 가능성은 Plutarchos(고대 로마철학자, 저술가, 46?~120?)의 기록 등에서 확인이 되며, 이를 근거로 쓴 Shakespeare(1564~1616)의 희곡 Julius Caesar 제 1 막 2장에 출현한다. '시저가 안토니우스에게 "나의 오른쪽 귀에 말하라. 왼쪽 귀는 안들리니까."라고 하였고,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에게 "시저가 falling sickness를 앓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였다.'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Martin Luther (1483~1546)는 자신의 어지럼이 사탄이 들어와서 일으키는 증상으로 의심하였고,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인 Dean Swift(1667~1745)의 남겨진 편지에서도 그가 어지럼 질환을 앓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Vincent van Gogh(1853~1890)의 병력은 대체로 어지럼 보다는 간질 또는 정신분열증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1)2) 한편 메니에르병일 가능성에 대한 주장도 있다(Fig. 5).10)

19세기 이전:내이 해부학의 발전시기
  
내이는 기관의 크기가 작고 복잡하며, 두개골 속에 들어있는 구조적 특성으로 인하여 타 분야에 비하여 해부 및 생리의 발전이 늦게 이루어졌다. 고대에 Galen(130
~200)은 내이의 이러한 특징을 "미로(labyrinth)"라고 부르며 공기가 차있는 구조라고 하였다. 의학적 문제 뿐 아니라 당시 유럽을 통제하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종교적 이유로 인체의 해부를 엄격히 금지하여 해부학의 발전이 한동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종교적 통제는 1530년 무렵 교황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 시대부터 교회의 입장이 변경되면서 완화되어 연구 및 교육목적의 인체해부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때 이후 Andreas Vesalius(1514~1564, Fig. 6), Gabriel Falloppio(1523~1562, Fig. 7), Giovani Ingrassia(1510~1580, Fig. 8), Bartolomeo Eustachio (1510~1571, Fig. 9) 등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유명한 해부학자를 통하여 이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발전계기가 된 것은 17세기 후반 Antony van Leeuwenhoek에 의한 현미경의 발견이다. 이 때 이후 내이 해부학의 발전은‘현미경적 소견’을 통하여 이루어져 내이생리학 발전의 근간이 될 만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Domenico Cotugno(1736~1822, Fig. 10)는 현미경과 변성되지 않은 신선한 측두골을 처리하여 해부하는 방법을 이용, 1775년에 발표한 본인의 해부학 저서인 'De Aquaeductibus Auris Humanae Internae Anatomica Dissertatio'를 통하여 전정 및 와우도수관, 미로 내 액체의 존재, 그리고 'cavitas aquaeductus membranea'라고 이름 붙인 내림프낭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하였다. Antonio Scarpa(1747~1832)(Fig. 11)는 1789년의 저서인 'Disquisitiones anatomicae de auditu et olfactu'에서 막미로의 존재를 기술하였고 본인이 'Scapa's fluid'라고 명명한 내림프의 존재를 기술하였다. 모두 현미경과 조직처리 기술이 없었으면 관찰하기 어려운 소견들이다. 이처럼 18세기 후반까지 이룩된 내이해부학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19세기의 내이생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19세기:내이 생리학의 발전 및 내이 질환의 이해
   1802년 Auenrieth이 반고리관이 소리의 방향을 감지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추정하였고, 1820년 Purkyne가 시운동성안진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인체의 움직임과 가속도는 피부압력에 따른 혈류의 변화에 의하여 감지된다고 기술한 바와 같이,1) 이전까지 귀의 역할은 오로지 듣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따라서 미로가 청각과 관련된 역할만을 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므로, 평형감각과 관련된 전정기능에 대한 이해는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전에 쌓인 내이해부학 지식을 토대로 내이 생리학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즈음 내이 생리학의 괄목한 업적을 남기 Marie-Jean Pierre Flourens(1794~1867)(Fig. 12)의 실험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비교해부학자로 비둘기를 이용하여 내이생리를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하여 1824년, 1842년, 1861년에 걸쳐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5) 그는 파괴된 반고리관에 따라 비둘기의 움직임의 방향이 변화되고, 청력은 보존되는 것으로 미루어 반고리관이 움직임 방향에 영향을 주는 기관이라고 결론지었다. 뿐만 아니라 어지럼이 뇌질환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다른 뇌증상이 없다는 것과, 동반되는 구토 등이 위장애가 아닐 가능성, 난청과 이명이 동반된다면 더욱 귀질환일 가능성을 기술하였고,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귀질환이 너무 자주 뇌질환으로 오인되고 있고, 무의미한 치료가 반복되고 있다'고 표현하였으며,1) 어지럼병이 소아보다 고령층에서 많다는 점, 그리고 청력은 소모되는 기능이므로 '젊은이의 보물'이라고 표현하여 보다 소중히 사용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2) 그의 괄목할 연구 성과는 19세기 이과학의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지만, 반면 반고리관이 평형기능 전체에 관여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고, 움직임의 방향에 영향을 주지만 와우보다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청력기관이라고 생각하므로써,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내이기능에서 전정기능을 분리해내는 학문적 도약은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이후 30여년간 내이분야의 연구는 Harless, Czermak, Brown-Sèquard 등에 의하여 그의 이론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을 볼 때 내이생리학 발전에서 큰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메니에르의 발표 이후
  
앞에 적은 바와 같이 메니에르는 1861년 9월, 그의 다섯 번째 논문을 발표한지 5개월 후 급성폐렴은 사망하여 추가적인 결과를 발표할 수 없게 되었고, 사망 당시는 물론 이 후 한동안 그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즈음 독일이 대학조직과 연구에 전념하는 교수의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이과학의 학문적 중심이 전통적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독일로 이동하여 다시 Toynbee, Von Trolsch, Itard, Politzer 등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1) 이 중 Adam Politzer(1835
~1920, Fig. 13)는 1861년 파리에서 메니에르의 발표를 듣고 독일로 돌아가 1867년 유사한 증례들을 모아서 보고하였고, 비록 내이출혈이 원인이라고 주장하였지만, 'Symptom der Meniereschen Krankeitform'라는 이름을 사용하므로써 '메니에르병'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는 계기가 되었다.2)6) 즉, 메니에르의 업적은 그의 사망 후 Politzer에 의하여 비로소 빛을 보게 된 셈이다.
  
이후 모든 어지럼을 보이는 질환에 '메니에르'라는 명칭이 붙어서 통용되었고(예를 들어, Menere's disease, Meniere's symptom complex, morbus Meniere, pseudo-Meniere's disease, atypical Meniere's disease, Meniere's disorder, Meniere's attack 등), 또는 다른 명칭을 사용하면서도 메니에르병과 같은 질환으로 간주되었다(예를 들어, aural vertigo, acute vestibular irritation, labyrinthine apoplexy, labyrinthopathy, labyrinthine dropsy, labyrinthosis, angioneurotische Oktavuskrise, status labyrinthicus 등).1)2)
   이러한 병명의 혼란은 같은 질병을 다른 질환으로 분류하거나, 다른 질병을 같은 질환으로 생각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학문적 발전을 저해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전까지 어지럼 및 난청 질환의 진단에 얼마나 많은 혼선이 있었는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명칭의 혼란은 이후 1938년 Yamakawa7) 및 Hallpike8)에 의하여 측두골 병리소견이 보고되면서 정리되기 시작하였으나 1972년 미국 안이비인후과학회 산하 청력평형소위원회9)에서 정의를 제안할 때까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맺음말

   Prosper Meniere가 메니에르병의 병태생리인 내림프수종까지 발견하고 연구한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그때까지 축적된 지식수준과 역사적 배경을 볼 때 어지럼의 원인을 당시까지 거의 생각지 못하였던 내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위대한 업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후 1926년 George Portmann의 내림프낭수술, 1938년 Yamakawa 및 Hallpike의 내림프수종 발견, 1972년 AAO-HNSF의 메니에르병 정의, 기타 치료를 중심으로 한 내이의학의 발전 등을 포함한 'Prosper Meniere 이후 메니에르병의 발전'기간을 맞이하게 된다.주2)
   1995년 AAO-HNSF에서 제시한 메니에르병의 정의는 '원인불명의 내림프수종'이다. 여기서 '원인불명'이란 원인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 우리의 지식으로 알지 못한다는 뜻임을 되새겨야 하겠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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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Politzer A. History of Otology, Part I. An English translation by Milstein, Stanley, Portnoff, Collice. Phoenix, Columella Press;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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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Committee on Hearing and Equilibrium. Meniere's disease; Criteria for diagnosis and evaluation of therapy for reporting. Trans Amer Acad Ophth Otolaryngol 1972;76:1462-4.

  10. 安田宏一. Van Goghはメニエ一ル病か. 耳鼻 1979;25:1427-39.

  11. Kim KS. The history of Meniere's disease: Until the discovery of endolymphatic hydrops(1862-1938). J Korean Balance Soc 2005;4:35-41.

(주)

  1. 실조성뇌울혈(congestiones cérérales apoplectiformes) : 19세기 이전까지 간질, 정신분열증, 어지럼 등에 총칭하여 붙였던 진단명이다. 1650년 Pemmel이 영어로 쓴 첫 번째 신경학 교과서에서 이러한 종류의 질환은 전적으로 뇌장애에 의하여 유발되는 것이며, 어지럼도 마찬가지로 중추신경계 장애 또는 행동학적 장애라고 기술한 이래 어지럼 질환에 이 진단명을 붙이는 상황이 19세기까지 이어졌다.

  2. 저자는 메니에르병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중요한 역사적 업적을 기준으로하여 임의로 세 기간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1861년 Prosper Meniere의 발표, 두 번째는 메니에르병의 이해의 여명기이라고 할 수 있는 1938년 Hallpike 및 Yamakawa의 내림프수종의 측두골 병리소견 발표, 그리고 이 후 현대적 의미의 진단 및 치료의 역사이다. 두 번째 시기에 대한 정리는 학회지별 게제 시기에 따른 차이로 앞서 대한평형의학회지에‘메니에르병의 역사;내림프수종의 발견까지(1862~1938)’라는 제목으로 게제되어 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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